◈ 카페 마담 <초수 (草愁)> ◈

차 한 잔의 선율 2013. 12. 22. 22:48

 

 

 

카페 마담 <초수 (草愁)>

 

사람의 주성분은 '사랑(愛)'이라는데

행복한 사랑을 받다가 허무하게 가버린 한 카페 여인.


'사랑(愛)'이라는 말에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

깊이 파고 들려 하지도 말고
그냥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으로만 생각하자.

 

뭍 남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여의도 마지막 낭만인

초수(草愁)라는 별호를 가진 여자.

 

자그마한 카페를 경영하던 여자, 성씨가 임씨라는 것,

그리고 막연히 여수가 고향이라는 것과
얼굴이나 몸매도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미혼이며,

사랑에 한 번 실패한 여자 같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대학을 다녔는지는 몰라도

그 지적(知的)인 폭이 넓어 우리를 감탄케 했고
서툰 술을 손님과 함께 했고 서툰 노래를 정성껏 불렀던

정이 많고 마음이 아름다웠던 여자였다.

 

아무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잘 알지는 못하드라도

예외없이 눈물을 감추지 못했고,
기쁜 일을 들으면 자기 일처럼 좋아했던 여자였다.

 

 

 

 

풀잎 같은 여자 ‥‥ !

 

그래서 '풀잎의 우수'라는 의미의 별호인 초수(草愁)도

손님들이 붙여 준 것이었다.


손님들은 그 여자를 '미스 임'이니 '마담'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친근하게 '초수(草愁)'라고 불렀다.

 

그 카페를 찾는 사람마다

도대체 장사를 하는 여자 같지 않다'고 할 정도로
빈주머니로 와서 술을 마실 수 있었고,

한 1 년 외상을 갚지 않아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고,


전라도 사투리가 정겨웠던 여자로,

요즈음 세상에 퍽이나 괜찮은 '카페 여자'라는 생각을
하게 했던 사람이었다.

 

'카페 초수(草愁)'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롯사'라는 간판으로 출발했다.
'장미'의 여성명을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

 

 

 

 

여의도 지역의 카페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저녁부터는 가볍게 술을 마실 수 있지만
낮에는 부근의 빌딩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위해서 간단한 점심을 판다.


롯사도 그런 카페 중의 한 곳이었다.

 

어느날 아나운서들이 점심시간 출입 때에

'시골 잔치 국수의 원형을 살려 보라'는 권유를 받고
가볍고 부담없는 메뉴를 마련하게 된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후부터 음식 솜씨가 좋은 덕에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됐고

그 손님 가운데는 KBS 아나운서들이 비교적 많았다.

 

화면 속의 괜찮은 주인공들이

한 번도 잘난 척하지 않고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고,
아무리 비밀스런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 비밀을 다 지켜주는 것이 고마웠으며,


술을 팔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내 집 카페 같아 좋았으며
한 번 같이 온 적이 있는 우리의 친구들을

영락없이 기억해주는 것이 놀라웠다.

 

 

 

 

고향에라도 다녀 온 날이면 고향의 맛을 가져 와서는

고향 자랑에 침이 말랐던 여자였고,
한 번 내놓은 약속의 말은 몇 달이 지난 후에라도 기억했다가

지키는 진실이 있었던 여자였다.

 

아나운서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돌지않는 풍차'의 사연과 노래를

함께 사랑해서 초저녁부터 자정까지라도

그 노래를 듣도록 해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여자였다.

 
그러다가 노래를 할라치면 고(故) 이진섭 아나운서가 작곡했던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슬프디 슬프게 불렀던 여자였다.

 

우리는 청담을 했고 낭만을 이야기했으며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했다.


카페 '초수'에 있는 동안은 아귀다툼의 세상과 영악한

삶의 이야기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고
잠시나마 동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 여자는 찌든 세상사사와는 무관한 듯한

착하디 착한 '순딕이' 같은 여자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서툰 작가가 쓴 멜로드라마의

갑작스러운 종결처럼 어처구니없이 운명을 종결지었다.


비보를 전해 들은 아나운서들과 카페 '초수'를 자주 찾았던 단골 손님들은

마치 가족을 잃은 듯한 슬픔을 느꼈고,
그의 영정이 걸려 있는 병원의 영안실에 찾아가 머리숙여 슬퍼했다.


아마 카페 마담의 죽음 앞에

그렇게 여러 아나운서들이 찾아간 것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주변 상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고인이 아주 유명한 사람인 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영안실에 걸려 있던 그 여자의 사진은

생전에 카페에서 손님을 맞을 때처럼 담담히 미소짓고 있었다.
아니 우리가 여지껏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언제나 그 카페의 벽에 걸려 있던 

'국화는 찬 모래땅에서 피어난다!'는 의미의
김병연(삿갓)의 해학시를 옮겨 놓은 '국수한사발(菊樹寒沙發)'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맛있는 국수를 만들어 주던 참 좋은 여자였는데 ‥‥

 

 

 

 

사랑했던 사람도 없었을까?

 

그를 사랑했던 그 많은 여의도의 아나운서들 가운데
그 어떤 한 사람쯤은 보통보다는 좀 더 깊이 사랑했을 법도 한데 ‥‥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간 여자 초수(草愁) ‥‥ !

 

카페 '초수'를 찾아 주는 손님이면 한결같은 미소와 친절로
모든 이에게 고루 사랑을 베풀어주었던 여자 초수(草愁) ‥‥ !


그녀에겐 그 많은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요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초수(草愁)라는 카페의 주인을 잃어버린 후 어디에서도

그녀를 대신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 KBS 이계진 아나운서가 방송가의 뒷얘기들을 모아 엮은
<딸꾹 !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책자의 내용 중에서
옮겨 온 글인데 부분적으로 약간 수정을 했습니다.